불교

불교가 노산지역에 전파된 후부터 지금까지 이미 1700여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노산의 불교는 위(魏)나라, 진(晉)나라시대부터 시작되었고 수(隋)나라, 당(唐)나라시기에 크게 발전되고 명나라에 와서 다시 호황을 누리다가 청나라후기부터 점차적으로 쇠퇴하였다. AC 412년, 인도 등 지에서 불경을 구한 고승 법현(法顯)이 해로로 귀국길에 올랐으나, 도중에 폭풍우를 만나 불기현(不其縣)에 위치한 노산 남안인 고로도(栲栳島) 일대에 표착하였다. 그 당시 불기현(不其縣)은 장광군(長廣郡) 관할지역이었으며 불교신자인 태수 이의(李嶷)는 법현이 인도에서 경전을 얻어 온 고승인 것을 알고 법현을 불기성(不其城)내로 모시고 오셔서 경전을 강론하고 설교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등륙한 곳에 석불사(石佛寺)를 지었다. 그 후부터 불교는 노산지역에서 명성을 크게 떨치고 광범하게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후에는 연이어 석죽암(石竹庵)과 사연원(獅蓮院)이 지어지고 북위(北魏)시기 법해사(法海寺)의 창건으로 노산 불교의 초보적인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당나라시기 스님 보풍(普豊)이 사천 어메이산(峨嵋山)으로부터 노산에 와서 현재 왕거장진 대교촌 동쪽에 대비각(大悲閣)을 세우고 대비 관세음보살을 모셨다. 후에 협구묘(峽口廟)로 개칭되고 그 후에는 철기산(鐵騎山) 동쪽에 분원을 세우고 그 이름은 임화암(林花庵)이다. 또한 협구묘(峽口廟) 동쪽 2.5km되는 곳 동대촌에 별도로 분원을 세웠는데 그 이름은 보제사(普濟寺)이다. 또한 노산 거봉의 남쪽에는 백운암(白雲庵)이 지어졌다. 송나라, 원나라 시기까지만 해도 불교와 도교는 그래도 서로 화목하게 잘 지냈다. 만력(萬歷) 11년(1583년) 명나라 4대 고승중의 한명인 감산(憨山)스님이 노산에 와서 만력(萬歷) 11년부터 노산 태청궁 삼청전앞에 거액의 자금을 투자하여 기세가 웅장한 해인사(海印寺) 를 지었다. 후에 태청궁 도사들과 분쟁이 발생되어 진사(進士)출신은 도인 경의란(耿義蘭)이 북경에 가서 임금에게 고소하였다. 만력(萬歷) 18년(1600년) 조정으로부터 사절을 없애고 궁전을 회복하라는 전교가 내려졌다. 감산(憨山)스님도 먼 뢰주(雷州)로 유배되었다. 노산 불교는 이런 타격을 받았지만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계봉(桂峰), 자화(自華) 및 자접(慈沾) 등 유명한 스님들은 계속 노산에서 많은 불교활동을 펴갔고 현지 관원들과 선비들의 지원으로 노산의 불교는 계속 발전해왔다. 대충 통계한데 의하면 명나라, 청나라시 건설된 사원은 20여개소이며 그 중에 가장 영향력이 큰 사원은 청나라 순치(順治) 9년에 지어진 화엄사(華嚴寺)이다. 이 사원은 규모가 웅대하고 명성도 자자했다. 청나라 옹정(雍正)년간에 발간된 《대장경》 1부와 원나라시 수사본 《책부원귀(冊府元鬼)》가 수장되었다. 청나라 말기 중화민국 초기만 해도 화엄사는 1500여년 역사를 가진 석불사, 법해사와 나란히 노산 불교의 3대 사원으로 불리웠다. 중화민국시기에 노산 불교는 상황이 갈수록 나빠졌고 점차적으로 쇠락해졌다.
‘문화대혁명’중 각 사원의 신상은 때려 부수고, 경권, 문물은 불태워 버리고, 스님들은 돌려보내고, 대전은 폐쇄되었다. 하지만 일부 종교문물들이 민중들로부터 보호해왔다. 화엄사의 《대장경》과 《책부원귀(冊府元鬼)》는 청도시 문화부문에서 구출했고 사자구 동풍조선소의 직원들은 석불사와 대석사의 5개의 철불은 완벽하게 보관하였으며 원두촌 촌민은 법해사 건륭시기 재정비된 비석을 집에 가져다 잘 보관하였다. 11회 3중전회후 공산당의 종교정책이 새롭게 실시되어 ‘문화대혁명’기간 돌려보낸 스님 14명, 여승 7명이 전부 정책을 실시하여 그들의 생활도 타당하게 배치하였다. 1985년 청도시는 불교협회 준비위원회가 설립되고 정부에서 전문 자금을 조달하여 노산 화엄사와 법해사를 수리하여 복원시켰으며 이 두 사원은 청도시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