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교

노산은 도교발상지중의 한 곳이다. 노산은 춘추시대서부터 장기간 양생,수신하는 도사들이 많이 모였었고 전국후기에 와서 노산은 해내외에서 유명한 “동해신선의 산”으로 이름났다.
진시황의 동방 순행, 한무제의 2차의 불기(不其, 현 청도시 성양구)방문도 도교 활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서한무제 건원원년(建元元年, BC 140년) 장염부(張廉夫)가 노산에 와서 허술한 암자를 지어 삼관(三官)를 공양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노산 도교의 시초라고 한다.
송나라 초기 노산도사 유약졸(劉若拙)이 송태조(宋太祖)로부터 화개진인(華蓋眞人)이라는 칙령이 내려져 노산 각 도교 사당들은 전부 새로 창설된 “화개파”에 예속되었다.
금나라, 원나라이래 도교 전진파(全眞派)가 일어서기 시작하였고 노산 각 사당들은 분분히 “북칠진(北七眞)”의 각 교파에 귀의하였다. 칭기즈칸이 구처기(邱處機)를 칙령한 후 노산도교는 전성기를 맞이했다. 명나라에 와서 노산도교의 용문파(龍門派) 는 3개 교파로 파생되어 교파 총수량이 10개 되었고 노산 및 주변지역의 도교는 장기적으로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청나라 중기에 도교 관련 건물은 100개소 가까이 되어 “九宮八觀七十二庵”의 설이 퍼지기 시작했다.
근대이래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으로 노산 도교는 엄중하게 파괴되었다. 도사 살해, 도관 폭파 훼손, 진장품 약탈 사건 등으로 노산도교는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건국후 청도시 인민정부는 1952년에 전문 자금을 조달하여 노산 도교 사당에 대하여 중점적으로 수선하고 노산도교의 보호 및 생존이 유지되었다.
‘문화대혁명’ 전기에 노산도교는 ‘四舊’로 간주되어 충격을 받아 신상이 훼손되고 도사들을 돌려보내 노산도교 종교활동이 폐지되었다.
최근이래 청도시 인민정부는 점차적으로 계획에 의해 일부 노산도교사설을 회복하고 종교정책을 실시하며 도사들을 불러드리고 신상을 다시 수선하고 사당재산을 반환해주고 있다. 현재 노산에는 수선되어 대외적으로 재개방된 사당은 태청궁, 상청궁, 명하동과 태평궁이 있다. 노산 도교는 정상적인 종교 활동이 회복되었다.